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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ncyeollin

2025년 1월 13일



2025년 1월 13일 


[수9:1-15]

1 이 일 후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2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더라

3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4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5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6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

7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위 사람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는 듯하니 우리가 어떻게 너희와 조약을 맺을 수 있으랴 하나

8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묻되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9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심히 먼 나라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소문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10 또 그가 요단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들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

11 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주민이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들이니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라 하였나이다

12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아직도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가지고 왔으나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가 났으며

13 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 새 것이었으나 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매우 길었으므로 낡아졌나이다 한지라

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오늘 본문은 어제 주일 설교와 같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어제 주일 설교에서는 기브온 주민들이 어떤 방법으로 여호수아를 속였는지, 그리고 그 속임수에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서 말씀 나눴습니다. 

오늘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 주민들의 속임수에 넘어간 이유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먼저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를 묻기 보다는 “나에게 유익한가?”를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8절에 보면 기브온 족속들은 화친을 맺으면 자기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을 종으로 삼는 것, 얼마나 이익이 되는 일입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것이 옳은가?를 생각하기보다 이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여 그들의 행동 방향을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결정의 중요한 동기는 "이것이 올바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유익하기 때문에, 이것이 나를 편리하게 하기 때문에, 이것이 나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이것이 내 삶의 목적과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에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온 주민들이 말하는 ‘여호와의 이름’의 실질적인 내용을 보지 못했습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심히 먼 나라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소문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용어 때문에 속았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들의 종교의 실질 내용을 알아보기보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만 듣고 그들과 화친을 맺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종교용어나 종교 의식이 아니라 종교의 내용입니다. 즉, 내가 얼마만큼 “예수”의 이름을 자주 부르는가, 내가 얼마만큼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 부르는가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내 생활의 내용은 어떠한가? 또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7장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22절). 그런데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절). 그들은 "주여, 주여"라고 소리를 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주의 이름을 빌어 기적과 권능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어라고 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종교적인 용어, 종교적인 의식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내용이 없이는 그 용어나 의식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본문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쉽게 속은 이유 중의 하나가 그들 앞에 나타나서 종교를 말하는 사람들의 참 내용을 알아보지도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는 사실 때문에 쉽게 적들의 간교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 생활의 타협의 유혹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용어와 의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이며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먼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어제 주일 설교때도 말씀 드렸는데요, 14-1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우리는 큰 문제 앞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지만, 작은 문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고 혼자서 결정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작은 문제가 우리를 결정적으로 넘어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유익하다는 사실 때문에, 또 상대방 이 하나님 이름을 들먹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의논드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속임수에 속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요? 사단은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속여 믿음을 잃게 하고 관계를 깨뜨리려 합니다. 이런 속임수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한 순간도 잃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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