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장 12절 - 2장 4절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립보서는 4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서신서이지만, 한절 한절 묵상할 때 큰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깊이 묵상할 말씀이 많이 있는데, 저는 그 중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묵상해 봅니다.
먼저 “생활하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플리테우에스타이라는 헬라어로 쓰였는데, 이 단어는 다분히 정치적입니다. 폴리테우마는 시민권을 뜻하고, 폴리테우에스타이는 폴리스 (도시)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것, 또는 도시 공동체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세윤 교수에 의하면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폴리스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빌립보는 빌립보서를 처음 시작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로마 식민 도시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빌립보인들은 자신들이 주변에 트라케라는 야만 민족과 접한 로마 식민 도시로서 그들은 항상 야만인들에게 로마의 높은 문명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바울은 이 사실을 교회를 설명하는데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 천국의 시민으로서의 높은 수준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는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메시지 성경은 “그때까지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어울리는 명예로운 삶을 사십시오.”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어떤 삶일까요? 바울은 본문에서 두가지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첫째는 협력하는 삶입니다. 협력이라는 단어는 “함께 경기하다, 한 팀으로 싸우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운동경기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혼자씩이 아니라 하나의 팀을 이루어 투쟁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또 서로로 번역한 헬라어는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늘어서 있는 군대가 방패를 들고 굳건히 서서 다가오는 적들을 맞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으로 명예로운 삶을 사는 것은 대적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입니다. 여러분 무언가를 두려워 해본 적 있나요? 사람이 무언가를 두려워할 때 나타내는 증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에 사로 잡힌다는 표현 있죠? 여러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잘 아시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골리앗이라는 블레셋 장군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2.9m였습니다. 57kg이나 되는 갑옷으로 무장한 장수였습니다. 사울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군대는 골리앗이라는 장수에 대한 두려움 앞에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두려워하지 않는 다윗은 어떠한가요? 그는 행동을 했습니다. 사울왕에게 갔습니다. 자신이 골리앗과 싸울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골리앗 앞으로 나가서 물맷 돌을 던져 골리앗을 무찌릅니다. 승리를 얻었습니다.
다윗이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은 훈련이 잘 되었습니다. 이미 목동생활을 하면서 곰과 사자등 맹수와 싸워 이긴 경험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어떤 확신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승리 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마치 골리앗과 전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29, 30절에 보시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싸움을 당합니다. 우리는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확신이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그렇게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우리가 약해서 그런 것도, 우리의 믿음이 잘못되어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자신있게 행동하십시오. 자신있게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천국의 시민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숨김없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리스도인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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