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성경묵상
전도서 4-6장
매일성경묵상
히브리서 12장 1-13절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브리서 저자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습니다. 신약의 모든 서신서들은 그 저자를 직접 밝히고 있지만, 히브리서는 익명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로 남아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여러 주장을 하는데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주장은 바울 저작설입니다. 2세기 판테우스 시대로부터 이 서신이 바울적인 요소를 풍기고 있다는 의견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두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이 히브리어로 본문을 썼고, 후에 누가가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또한 오리겐은 문학 양식의 근본에 있어서 바울의 저작과는 다르다는 측면에서 의심했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누가 이 책을 썼는가를 아실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바울의 저작설에 강하게 맞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그 문체나 내적인 특징으로 바울 저작설이 배제되어가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구약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등을 볼 때 바울이 직접 쓰지는 않았어도 바울의 영향을 받은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신앙 생활 중에 경험하는 문제를 “우리 앞에 당한 경주"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바울이 자주 사용했던 이미지 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 상을 받도록 경주에 최선을 다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사도바울이 히브리 저자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의 신앙 생활을 끝까지 경쟁하며 승리를 쟁취해야 할 경주로 빚대어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경주는 끝이 있습니다. 경주는 경쟁자가 있습니다. 경주는 승패가 있습니다. 우리가 경쟁자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경주를 하기 위해서 두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믿음의 주님이고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 봐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도 물에 빠져 물먹고 당황하게 되면 수영의 폼을 잊어 버리고 허우적 거리게 됩니다. 문제가 없이 편안할 때는 예수님도 생 각나고 하나님의 말씀도 어느정도 기억이 되지만 정작 어려움을 만나고 앞이 캄캄할 때는 예수님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도 생각나지 않고 허우적 거립니다. 믿음 없는 세상사람들과 별차이 없이 힘들게 살아갑니다. 풍랑속에서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본 베드로는 예수님께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선을 잃고 바람을 봅니다. 바람을 볼 때 무서움이 찾아 왔고, 물에 빠져 갔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 지라(마14:30)”.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경주에서 이기려면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둘째,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달릴 수는 없습니다. 육상 선수들은 좋은 기록을 위하여 신발의 무게를 줄이려고 애쓰며 수영 선수들이 물의 저항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고 머리까지 깎습니다. 마찬가지로 무거운 짐을 지고는 절대로 생의 경주에서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주를 패배하게 하는 무거운 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짓는 죄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 죄가 있습니다. 따라서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그 짐을 벗어야만 합니다. 죄의 짐을 벗지 아니하면 절대로 경주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그 짐을 벗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강제로 벗기십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먼저 자신의 죄를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나에게 있는 어떤 죄를 벗겨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징계의 채찍을 들으셨는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 다. 물론 모든 고난이 다 죄 때문은 아닙니다. 더러 욥과 같이 의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때 징계라는 것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를 채찍질 하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사생자가 아니라 참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소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자 길 800키로를 걸을 때 중요한 두가지는 짐을 최소한으로 갖는 것이고,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걷는 것입니다. 처음 준비할 때 모든 사람들이 10키로 미만으로 짐을 싸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욕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10키로를 훌쩍 넘겨 버립니다. 그래서 다시 짐을 꾸려야 합니다. 심사숙고하여 필요없는 물건은 양을 줄이던지 과감하게 포기해야 합니다. 이렇게 포기하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마치 그 물건이 없으면 안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순례자의 길을 걷다 보면 배낭이 무겁다는 것을 인식하고 조금씩 버리는 물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배낭을 가볍게 해야 어깨가 눌리지 않고, 무릎도 다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노란색 화살표를 바라 봐야 합니다. 노란색 표를 놓치고 한참 길을 걷다 보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가게 되고, 중간에 반드시 돌아와 다시 노란색 화살표를 찾아 그 길로 가야 목적지로 갈 수 있습니다.
죄의 짐을 덜어야야 합니다. 끌고 다니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며 길을 잃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