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일독 말씀
사무엘상 8-10장
누가복음 18장 31-43절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이 변화산 사건 (9:31)과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실 때 (9:51)밝히셨듯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실 곳입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모든 것이 성취될 것임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며 인자에게 응하리라 하십니다. 여기서 응한다는 단어는 “성취하다,” “완료하다”의 의미를 가진 “텔레오”라는 단어가 수동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성취될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된 모든 사건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하나님이 구약에서 예언하신 모든 일들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일들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일들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여전히 예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 목적을 성취할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목적이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본문에서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 말씀이 감춰었다”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성취한다는 관점은 당시 유대인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세계관에서 살았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지만, 그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세워질 예수님의 나라를 고대한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고난 예고를 이해하려는 의지도 없었던 것입니다. 앞에 일어날 일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제자들은 영적인 맹인들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여리고 가까이 오셨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과 20-30키로 떨어진 곳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잠시 머물러 쉬는 곳입니다. 이 곳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맹인이 무슨 일이 있는 지 묻습니다. 무리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맹인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보통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표현하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왕을 뜻하는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맹인의 관점에서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므로 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무자비한 폭력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는 왕입니다. 다윗의 자손이 통치할 나라는 맹인이 눈을 뜨는 긍휼의 나라입니다. 지혜와 지식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영적인 눈이 멀었지만 거지 맹인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보고 있었습니다.
앞서 가는 사람들이 이런 맹인의 외침을 듣고 조용히 하도록 꾸짖습니다. 사람들은 앞서 갔습니다. 앞서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하실 소식으로 들뜬 마음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들떠 앞서 갔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앞서 가던 사람들의 꾸지람이 있었지만 거지 맹인은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칩니다. 어제 우리가 말씀을 나눴던 끈질기게 간청한 과부처럼 맹인은 물러지 않습니다. 이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은 멈춰 서서 그를 데리고 오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십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던 맹인은 이제 예수님을 “주”로 부릅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맹인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보기를 원합니다. 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원인이었기 때문에 이 원인을 해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믿음이 그를 구원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은 재판장에게 간청했던 과부처럼 사람들의 반대에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는 태도로 드러났습니다. 그 결과 그는 고침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앞서 가던 사람들은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볼 수 있었지만,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길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사람들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이 오시는지 알지 못했던 맹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알고 계십니까?
제자들은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하십니다.그들은 눈 뜬 맹인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충만함을 경험한 후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알고,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충만을 경험해야 합니다. 눈뜬 맹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바라보며 그 길을 따라 살 수 있는 건강한 영적인 눈을 가진 삶을 살기를 간절함으로 기도합니다.
사순절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