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일독 성경말씀
신명기 5-7장
매일성경묵상 눅 15:11-32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너무 잘 아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3가지 비유중 마지막 비유로 돌아온 둘째 아들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유산을 다 탕진한 아들이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들이지만, 문 밖에서 매일 아들이 돌아 올 것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잃은 목자,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잃은 영혼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끝내지 않으시고 마지막에 아버지 집에 있던 큰 아들로 시선을 돌리십니다. 아버지 집에 있던 큰 아들은 죄인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대표합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할 때 램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환에 등장하는 큰 아들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아래 그림에서 큰 아들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아들을 끌어안은 노인을 바라보는 큰 아들은 한발 뒤로 물러서 있습니다. 그의 눈빛은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모습이 겸손해 보이지만 손을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어정쩡함이 있습니다. 웃음을 짓지도, 반갑다는 표현을 하지도 않습니다.
렘브란트는 큰 아들과 아버지를 대단히 흡사하게 그렸습니다. 둘다 수염을 기르고 있고,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습니다. 이런 외적인 요소들은 큰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가슴 아픈 차이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아들을 향해 몸을 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뻣뻣하게 서 있습니다. 손에서 바닥까지 곧게 이어진 지팡이는 그의 완고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 28절에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동생을 위한 잔치에 그는 동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는 단단히 화난 상태로 서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큰 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둘째 아들처럼 방탕하지 않습니다. 큰 아들은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의 재산을 먼 외국에 나가 허랑방탕하게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큰 아들은 그야말로 모범생입니다. 아버지 집을 비운적도 없으며,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질투, 분노, 불평 불만이 튀어 나오고, 아버지 집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집에 있다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며 아버지가 주시는 온갖 특권에 감사하기는커녕 형제자매를 시샘하는 원망 가득한 인간이 되어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큰 아들과 같은 분들 많이 계십니다. 하나님앞에 늘 큰 아들처럼 순종하는 아들이 되고 싶고, 늘 칭찬받는 아들로 하나님의 눈 밖에 들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분들 많이 계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무언가에 억눌려 의무감에 하는 순종은 언젠가는 표시가 나게 되어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 헌신하여 교회에서 각종 성경공부, 훈련등으로 신앙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크리스천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가 너는 왜 열심히 기도하지 않니?라는 말을 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감히 싸움이 될까 봐 말은 못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감히 누구한테 기도를 가르치려 드는 거야! 지금까지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아온 주제에, 이래봬도 난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말씀을 따라 산 모태신앙이란 말이야! 회심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거야!”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 앞에서.. 이런 심적인 분노를 경험한 적은 없습니까? 헨리 나우웬은 속으로 이렇게 까지 화를 냈다는 것은 그만큼 큰 ‘탈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집을 떠나 방황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집에서 자유롭게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분노하고 시기하는 모습 자체가 여전히 무언가에 속박된 종의 신세라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헨리 나우웬만의 문제일까요?? 사실 우리 가운데는 집에 있으면서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아들, 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눈 앞에 잔치가 벌어지는 데도 부자연스럽게 어정쩡한 모습으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큰아들은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집나간 탕자였지만, 큰 아들은 집 안의 탕자였습니다.
여러분 비유속에서 큰 아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잔치에 참여했나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결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결말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오늘 비유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비난했을 때 예수님이 천국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았을 때 기쁨으로 잔치를 하는 것이 천국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을 내세워 너희들은 이미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동생이 돌아오는 것을 원망하고 분노하여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한 천국 잔치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사실을 열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정한 용서와 사랑으로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지요… 뻣뻣한 자세로 동생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문 밖의 큰 아들은 아닌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열려있습니다. 동생을 더 사랑하는 분이 아닙니다. 두 아들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했던 것과 같이 큰 아들에게도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자고 권하며 간곡히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것이 아니냐..?” 여기서 얘라는 표현은 테크논이라는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조제프 피츠마이어라는 학자에 따르면 이 단어는 ‘더할 나위 없는 깊은 애정’을 담은 호칭’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두 팔 벌려 집으로 들어와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